이라크 파병에 관한 글을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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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조장희 작성일04-11-09 12:34 조회1,713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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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평론> 9-10월호에 실린 글을 읽었습니다.
아동문학가 박기범 님의 글인데 이것저것 생각해 볼 내용이었습니다.
나누고 싶어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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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이렇게 살아도 되는 것인가
이라크 파병을 보며
박기범 박기범 - 동화작가. 저서로 동화집 <문제아>가 있다. 지난 2003년 3월 이라크평화팀의 일원으로 이라크에서 반전·평화활동을 편 이후, 인터넷카페 ‘바끼통(cafe.daum.net/gibumiraq)을 중심으로 시민·어린이들과 함께하는 풀뿌리 평화운동을 끈질기게 펼치고 있다. 지난 8월 9일부터, 살고 있는 경북 울진에서 한국군 철수 및 이라크전 종전을 위한 캠페인을 진행하면서 단식 중이다.
단식을 시작한 지 스무 하루째. 어제 서울에 올라왔다. 이 나라는 지난 8월 3일 자이툰 부대 선발대를 ‘도둑파병’하더니, 마침내 어제(8월 28일) 본진을 떠나보냈다. 한 나라의 군대가 또 어떤 나라를 짓밟기 위해 떠나고 있지만 나라 안에서는 어떤 신문이나 방송도, 국민의 대표기관도 이를 얘기해주지 않는다. 그랬으니 사람들이 모르는 것도 어쩌면 당연하다. 그것과 상관없이 아무 일 없던 것처럼 지내는 것 또한 어쩌면 당연한지 모른다. 기어이 우리가 침략군을 보낸 나라의 백성이 되고야 만 날, 이 부끄러운 순간이라도 똑똑히 기억해 두어야겠다는 마음이 나를 서울로 떠밀었다. 적어도 그것에 반대하고 슬퍼하는 이들, 함께 맞서 싸울 이들과 함께하려고 광장으로 쫓아올라왔다. 여섯 시간이 넘게 걸리는 길, 물론 조금 늦기야 했지만 올라와 보니 집회는 벌써 끝났다. 들어보니 모인 사람 수도 삼사백 명에 지나지 않았다고 한다. 솔직히 말해,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만큼은 침략군을 떠나보낸 이 나라의 처지가 슬픈 것보다 침략군을 보내놓고도 버젓이 아무 일 없는 듯이 살아가는 우리네 현실이 더욱 슬펐다. 무섭고, 어지러웠다.
요사이 한참 시끄럽던 올림픽, 어쩌다 본 텔레비전에서는 아테네라는 도시에서 폭죽이 올라오는 모습이 보였다. 사람들은 아주 흥겨워했고, 그것을 보여주는 텔레비전은 그 분위기를 한껏 부추겼다. 바로 그 시간, 나자프라는 도시에서는 최소 백육십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전투기의 캐논포와 바주카포에 맞아 죽어가고 있었다. 모르긴 몰라도 올림픽이 열리던 아테네와 학살이 벌어지던 나자프는 서울과 도쿄의 거리만큼이나 멀지 않은 곳. 한 하늘에는 축제의 폭죽이 그리고 건너편 하늘에는 학살의 불꽃이 함께 피어오르고 있었던 거다. 학살만 해도 무서운데 그 학살 곁에서 축제를 벌인다는 현실이 나는 더욱 무섭다. 이 무서운 현실 앞에서 나라 안의 온갖 방송과 언론은 오로지 축제의 불꽃만 보여주고 있었고, 사람들조차 온통 그것에만 사로잡혀 있다는 것은 더더욱 무서웠다.
잘라 말하면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젊은이들을 두 모둠을 지어 내보냈다. 한 모둠은 올림픽 선수단, 또 한 모둠은 자이툰 부대. (결코 운동경기를 깎아내리려 하는 것은 아니다. 나 또한 월드컵이나 올림픽이 열리면 좋아하는 경기를 빼놓지 않고 보는 편이었다. 더구나 결승이나 메달을 앞둔 마지막 경기에서 드라마틱하게 역전과 재역전을 되풀이하는 장면이라도 나오면 숨이 막히도록 흥분이 되고 손에 땀을 쥐었다. 돈에, 권력에, 패거리의 힘에 좌지우지되는 세상의 승부들에만 질려 있다가 그나마 정직한 승부, 최선을 다하는 모습, 결과에 대한 깨끗한 승복이 지켜지는 운동경기는 그것만으로도 아주 훌륭하다. )
한 모둠은 그 애초의 정신이야 어떻게 변질이 되었건 적어도 잔치의 자리, 축제의 자리에 가있다. 그리고 또 한 모둠은 학살의 땅에 침략자가 되어 떠나 있다. 학살의 땅에서는 날마다 사람들을 죽이고 있다. 가장 끔직한 모습으로, 가장 처참하게 사람들을 죽이고 있다. 죽지 않은 이들이 느낄 공포와 고통은 죽은 이들의 것 못지않다. 바로 그 땅에 우리 젊은이들이 동참하고 있다. 죽이고, 짓밟고, 피를 묻히고 있다. 하지만 나라 안 어느 신문이나 텔레비전을 보아도 학살의 땅에 가있는 우리 젊은이들 소식은 전하지 않는다. 학살의 땅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에 대해서는 영 모른 척하기만 한다. 그러면서 축제, 축제, 축제. 우리는 한 손에 피를 묻히고 있으면서, 한 손으로는 무자비하게 이웃나라 사람들을 죽이고 짓밟고 있는데도 그건 영 모른다는 척, 알면서도 모른 척 운동경기장에만 눈을 두고 있다. 세상이 이렇게 돌아가도 되는 걸까? 우리는 정말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걸까?
지난해 3월, 이 전쟁이 시작하기 전 아무런 계획도 없이 이라크로 떠났다. 맨 몸으로 사람들이 모인다고 했고, 여러 나라에서 꽤 많은 사람들이 모인다는 말을 들었다. 맨 몸으로 하는 일이라면 나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폭격이 쏟아지던 밤들, 나는 그 소리에 놀라 방공호에서 손으로 모리를 감싸고 벌벌 떨기도 했다. 오히려 나는 함께 지내던 이라크 친구들에게 위로를 받기도 했다. 그리고 한국에 돌아와 지금까지 이 전쟁과 함께 살고 있다. 이 전쟁 내내 내가 배우고 있는 것을 두려움이고 부끄러움이다. 나는 요즘 들어 자주 흥분해서 말하는 나를 본다. 지금 모습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답게, 열심히 사는 동무 앞에서도 내 감정에 못 이겨 가시 돋은 말을 하기도 했다. 그런 말들은 사실 누구를 향해 있기보다 다 나에게 하고 싶은 말을 어 쩌지 못해 소리치는 울부짖음 같은 거였다. 지금 단식을 하고 있는 것도 그렇다. 분명 나는 파병철회·철군 싸움의 무기가 되고자 음식을 끊은 것이지만 내 안으로는 여전히 어떤 부끄러움 때문이기도 하고, 지우지 못하는 두려움 때문이기도 하다. 그동안 단식일지를 써오면서 구 부끄러움과 두려움을 고백했다. 그 가운데 나를 가장 힘들게 하던 이야기이면서 앞으로 두고두고 풀어나가야 할 숙제이기도 한 것 몇 대목을 아래에 붙인다. (단식 4일째였던 8월 12일과 9일때였던 8월 17일의 단식일지 가운데서)
“승용차를 버려야 파병도 안할 수 있다”
지난겨울 16대 국회에서 파병안 통과가 있기 전 보름 단식을 마치고 바로 찾아간 곳이 안동이었다. 권정생 선생님은 아주 몸이 좋지 않으신대도 그날따라 반겨 맞으며 좁디좁은 방안까지 들여 주셨다. 그리고 두어 시간 말씀을 들었는데 그때 하신 말씀 중에 단식은 왜 했느냐고, 그런 거 하지 말라고, 하려면 한 천명이고 만 명이고 다같이 청와대 앞으로 가서 굶으면 모를까, 혼자 그리 굶는다 해서 어찌 되겠느냐 하셨다. 지금같이 해서는 될 일이 아니라는 말씀이셨다. 그러면서 잇는 말씀이 대강 이랬다. 환경운동을 한다는 사람들이 죄 차를 몰고 다니면서 독한 연기를 뿜고 다니는데 그게 무슨 환경운동이냐고, 텔레비전에서 전쟁반대 데모 같은 걸 봐도 얼굴에 화장을 하고 좋은 옷을 입고 하는데 그래서 어떻게 전쟁을 반대하겠느냐고. 기름 때문에 지금 전쟁이 일어나고 있는데, 기름을 그리 써대면서 무슨 전쟁을 반대하느냐고.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선생님의 이 말씀을 새겨듣지 못했다. 한다는 소리가 겨우 “어휴, 선생님 자수할게요. 저도 오늘 자동차 운전해서 왔거든요.”하는 말을 어리광처럼 했다. 그러고는 “그래도요, 더 못되게 자연을 망가뜨리고 다니는 사람들, 못살게 굴고 빼앗는 사람들이 온 나라로, 전 세계로 다니며 그렇게 나쁜 짓을 하니까 그거 못살게 구는 거라도 좀 덜 못살게 굴 수 있게, 그거 막느라고 다니려면 어쩔 수 없이라도 차를 타야 하지 않아요?” 하고 물었다. 여전히 나는 어리광 섞인 말투, 선생님의 말씀을 꼭꼭 새기며 생각해보지 않은 채였다.
몇 달 뒤, 아는 선생님 한분이 안동에 다녀왔다. 하시며 차 몰고 갔다가 선생님께 혼이 나고 왔다 하시며 웃었다. 그분 또한 “그래, 원칙으로야 선생님 말씀이 맞지. 그런데 요즘 세상에 어떻게 차 없이 살 수가 있나?” 하며 말끝을 흐리면서 씁쓸한 웃음을 지을 분이었다. 여전히 나는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아마 이분처럼 나도 요즘 세상에 어떻게 차 없이 살 수가 있나 하는 정도로 그저 흘려버리기만 한 것 같다.
그러다 문득 선생님의 말씀이 되살아나 나를 흔들어놓은 건 광화문 집회에 올라갔다가 내려오려고 동서울 버스터미널에서 버스를 탈 때였다. 생각해보면 나는 지난여름 이라크에서 돌아오고 난 뒤, 가을에 2차 파병에 대한 이야기가 한창 될 때부터는 거의 반년 동안 주말마다 반전집회에 참석하러 서울에 다녀왔다. 서울까지 버스값이 이만사천 원이니 한번 다녀오면 적어도 오만 원. 찻삯만 해도 보통이 아니었다. 때로는 버스를 탔고, 때로는 손수 차를 몰았다. 짐을 많이 싣고 가야 할 때나 다니면서 이곳저곳 들러야 할 곳이 많다 싶으면 주저 없이 차를 몰았다. 버스값보다 차를 몰고 가는 값이 조금 더 비싸기는 했지만 몇 천원 차이이니 그리 큰 낭비를 한다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러면서 어쩌다 한번씩 나 말고 다른 분들도 서울에 갈 일이 있어서 내 차에 몇 사람을 태우면 나는 대단한 절약이라도 한 듯 뿌듯해 했다. 네 사람이 버스를 타려면 차비가 십만 원은 드는데 한 차로 가면 많아야 삼사만 원이면 가지를 않나?
하지만 나는 올봄, 버스를 타고 내려오다가 머리를 얻어맞은 것처럼 크게 놀랐다. 울진까지 내려오는 버스, 30명이 넘게 탈 수 있는 버스에 고작 세 사람이 앉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절약이라고? 나는 내가 살고 있는 모습, 내가 쉽게 생각해버리고 있던 것들이 온통 잘못되었다는 걸 알았다. 만약에 나는 네다섯 사람이 함께 가는 길이었으면 승용차를 몰아 한 차에 타고 내려왔을 거다. 그러면서 버스값에 견주어 칠팔만 원은 아꼈으니 대단한 절약을 했다고 자부했겠지. 그런데 과연 그런가. 내가 따로 승용차를 몰고 내려온다 해도 버스는 여전히 겨우 두서너 사람만을 태운 채 똑같은 기름을 태우고 울진까지 내려올 것이다. 승용차를 탄 그 다섯 사람은 버스값 칠팔만 원 정도를 아끼게 된 셈이지만, 기름은 버스 한 대가 태워도 될 거세 자가용 한대 기름을 더 태우게 된 것이다. 이게 절약인가.
내 셈법은 이리도 간사했다. 다섯 사람이면 승용차 한 대로 움직일 수 있으니 버스값을 아낄 수 있다는 발상은 그야말로 내 주머니의 절약만을 생각한 것이다. 세상은 지금 석유가 없어 전쟁이다. 석유를 빼앗기 위해 미국과 영국을 비롯해 내 나라 한국까지 침략전쟁을 벌이고 있다. 죄 없는 이라크 사람들을 폭격 속에 죽어가게 한다. 거기에 나는 반전을 외치면서, 이라크에서 만나고 온 이들의 죽음에 가슴아파한다면서 한편으로는 태우지 않아도 될 기름을 더 태우고 있었다. 어처구니가 없다. 부끄럽다. 내가 과연 전쟁 반대를 말할 자격이나 있는가.
“승용차를 버려야 파병도 안할 수 있다.” - 권정생 선생님이 <작은책> 8월호에 쓴 글의 제목이다. (혹시 아직 읽지 않은 분이 있으면 꼭 읽기를 바란다.) 선생님이 말한 승용차는 비단 승용차만을 말하는 것이 아닐 것이다. 옳은 길이 아님을 알면서도 편안함만을 쫓는 우리의 생활방식. 내 몸, 내 생활은 계속해서 기존 질서에 순응해서 파괴하는 삶대로 살아가면서 근본적인 삶에 대한 성찰은 없는 채, 어떻게 세상을 구원할 수 있겠는가를 묻는 호된 가르침일 것이다.
나는 참을 수 없이 부끄러웠다. 그토록 권정생 선생님을 따르고 배우며 살고 싶다 하면서도 결국에는 그렇게 진짜 가르침을 몸으로 받지 못하고 지냈다.
선생님은 <녹색평론> 지난호에서 “고속도로를 씽씽 달리는 자동차들이 바그다드를 향해 폭격을 하는 전투기와 하나도 다르지 않다”고 말씀하셨다. 지금까지는 그래도 주저 없이 선생님을 죄러 가고, 선생님 앞에서 어리광도 부리고 했지만 앞으로는 오랫동안 선생님을 찾아뵙지 못할 것 같다는 마음이 들었다. 당장 읍내에 나가 자전거를 샀다. 가파른 언덕이 넷, 자전거를 타고 읍내에 한번 나갔다 오면 옷이 땀에 절어 다 달라붙는다. 하지만 김선일 씨가 죽고, 그 뒤로 저녁마다 군청 앞에서 피켓시위를 시작하면서 나는 다시 차를 몰았다. 울진읍까지 나가려면 20킬로, 날마다 걷거나 자전거를 타고 고갈 길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 단식을 하면서 농성장에 다니는 것 또한 차에 몸을 기대지 않고는 다닐 수가 없다.
지금도 차에 시동을 걸 때마다 가슴에 내려가지 않고 걸리는 게 있다. “석유가 모자라 사람들은 죽고 죽이는데, 나는 또 얼마만큼의 석유를 태운다.” 그저 지금은 최소한 버스가 닿는 곳, 닿는 시간이면 승용차를 타지 않겠다는 약속이나 할 뿐이다.
평화를 위한 삶의 방식
결국이 전쟁은 부시가 일으킨 것이기도 하지만 현재 삶의 방식에 길들여져 사는 내가 낳은 것이기도 하다. “나는 반전평화를 외쳤어, 나는 파병반대를 말했어, 나는 전쟁을 일으키는 저들 편이 아니야!” 하는 것이 과연 우리에게 면죄부를 줄 수 있을까? 아무리 소비하는 삶의 반대편에 서고자 했다 해도, 아무리 개발에 반대하고 전쟁에 반대한다 해도 결국 나는 소비하는 삶을 아주 다 거부하지 못했고, 어떤 식으로든 개발과 전쟁의 이익에 기대어 살았다. 전쟁 앞에서 전쟁을 막고자 하는 노력이 틀렸다는 것이 아니다. 그건 의심할 것 없이 하루라도 미루어서는 안 되는, 당연히 해야만 하는 일이다. 허나 지금 벌어지는 전쟁을 막고자 애를 쓰는 것과 동시에 우리가 전정으로 이 세상에서 전쟁을 없게 하려면 삶의 방식을 바꾸어야 하지 않을까? 소비에 기대지 않는 삶, 자본에 기대지 않는 삶, 개발에 기대지 않는 삶, 우리부터가 소비와 자본, 개발로부터 자유로워야 비로소 우리는 그것들에 맞서 싸우는 데서 제대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다.
어차피 이 지구에 있는 석유는 바닥이 날 것이다. 지금 부시를 비롯해 석유 개발권을 욕심내는 자본이야 그것을 알고서 발빠르게 탐욕을 부리고 있는 것이지만 몇 백 년 뒤 석유가 바닥이 나고 나면 정작 그때는 어떻게 할 것인가? 반전운동을 하는 이들조차 석유 없이는 아무것도 못하는 지경에 와있는데, 그야말로 석유가 바닥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석유에 기대는 삶의 방식이 바뀌지 않는 한 어떤 선한 권력, 어떤 반자본적 권력이 들어선다 해도 결국 전쟁은 불가피한 것이 아닐까? 당장 써야할 석유가 모자라 전쟁을 벌이는 때가 와도 석유를 태우면서 전쟁을 하지 말라고 할 것인가? 한 마을에 물이 모자라 싸움을 하면 적어도 그 싸움을 말리겠다 하는 사람은 물을 최소한으로 덜 써야 하는 것 아닌가? 이 전쟁 앞에서 과연 누가 자유로울 수 있겠는가?
당장 급한 것은 물론 이 침략과 점령에 맞서는 것, 날마다 최소 스무 명 이상을 죽이는 이 학살을 끝내는 것이다. 침략자들은 일년 반 동안 모두 사만 명의 목숨을 죽였다. 하루 최소 스무 명, 한 달에 천명 가까운 사람들을 죽이고 있다. 이 전쟁의 끝을 하루라도 앞당기면 스무 명의 목숨을 더 살릴 수 있다. 이틀을 앞당기면 마흔 명, 한달을 앞당기면 천 명의 목숨을 살릴 수 있다. 당장 멈추게 해야 한다. 동시에 그것과 아울러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이 전쟁을 낳을 수밖에 없도록 하는 우리들 삶의 방식을 바꾸는 것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석유 중심의 개발과 소비에 기대는 삶을 바닥부터 바꾸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석유에 기대지 않아도 좋을 다른 에너지를 찾아 써야 하고, 석유든 다른 에너지든 굳이 기계의 힘에 기대지 않고 살 수 있는 삶으로 되돌아가야 할 것이다. 이것이 없는 채 전쟁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석유를 품은 땅이면 이라크가 아니라 사우디아라비아에서도, 러시아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
침략군을 보낸 나라의 백성
7월 말, 울진 군청 앞에서 군민들과 함께 ‘파병철회 작은 문화제’를 준비하던 때, 한 플래쉬 영상을 보고 나는 숨이 멎는 것 같았다. 그 플래쉬는 대구에 사는 박선주 님이 <한겨레>의 ‘왜냐면’에 쓴 글을 바탕글로 삼아 만든 것이었는데, 그 가운데 한 대목이 이랬다.
… 부끄러운 나라에 살고 있는 부끄러운 사람입니다. 어릴 적부터 남을 때리지 말라고 배웠고 어린아이를 때리면 부모님께 혼났습니다. 그리고 이제 세살자리 아이를 둔 부모가 되었습니다. 아이에게 약한 자를 때리지 말라고 가르쳐왔습니다. 그러나 이젠 아무것도 가르칠 수 없습니다. 난 수천 명의 아이들이 폭격을 피하려고 숨어있는 지하실에 정확히 명중시킨 날에 손뼉을 치는 사람입니다. 내 나라가 나를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 아이가 감기에 걸렸는데 이라크 수만 어린이들의 죽음보다 내 아이 감기를 걱정해주는 자애로운 대통령이 있는 나라에 목숨 부지하며 살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정치인들은 매일 싸우는 것 같아도 아이들을 죽이느라 피곤한 미군들이 곤히 잠들 수 있도록 막사도 지어주고 미군들의 총이며 짐을 얼른 받아주기 위해 공병을 보내기로 하는 데는 힘을 합치고 있습니다. 내 손에 칼은 없지만 난 분명 남의 아기를 죽였고, 그 옆에서 울며 막아서는 엄마를 또 죽이고, 내일은 그들 가족, 그들 이웃 모두를 죽일 겁니다. 이런 고통을 잘 참았던 대가로 난 내일 고기가 오른 밥상을 대하겠지요. 그 아이들의 살점이 대신해서 내 입으로 들어가 단맛을 내고 내 속에서 오장육부를 튼튼히 하겠지요. 그렇게 난 살이 찌겠지요. … 아, 저는 살려 달라 애원하는 수만의 아이를 무차별로 총질하며 한 팔로는 내 아이를 감싸고 있는 천박한 어미가 되었습니다. …
어쩔 수 없이 나는 침략군을 보낸 나라의 백성이 되고 말았다. 이 나라의 군대 또한 침략군과 한 패거리가 되어 그 땅 사람들을 죽일 것이고, 그 땅 사람들의 것을 빼앗을 것이다. 내가 아무리 이 전쟁을 반대했고 우리나라의 군대를 보내는 것에 반대를 해왔다 할지라도 피할 수 없이 나는 침략군을 보낸 나라의 백성이다. 내가 먹게 될 음식, 내가 집에서 켜는 전깃불, 개나 물을 데울 때 쓰는 가스, 먼 길을 갈 때 타는 버스 … . 그 모든 것들에는 이미 침략과 전쟁으로 죽어간 이라크인들의 목숨이 스며 있다. 내가 낼 세금이나 기름값, 가스값, 버스값, 음식값 따위들은 모두 이 전쟁과 관련이 없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들의 값이 올랐다면 그건 이라크로 보낸 군대의 총과 탱크를 마련하느라 더 높은 세금이나 물건값을 내게 되기 때문이고, 거꾸로 그 전보다 내려간다면 그건 수많은 이라크인들을 죽이고, 그 땅 사람들의 삶을 망가뜨려서 빼앗아온 무언가가 보태어졌기 때문이다. 값이 그대로라 해도 물론 마찬가지다. 벌써 지난 8월 10일, 이 나라 국회는 군대를 보내 싸우는 곳에 삼천 억이 넘는 돈을 쓰기로 결정했다. 앞으로 우리 군대가 이라크인에게 총을 들이댄다면 그건 내가 낸 세금으로 만든 총이며, 더구나 그 총으로 이라크인을 죽게 한다면 바로 내가 만든 총알로 그이들을 죽게 만드는 것이다. 누가 아니라고 할 수 있는가? 일제시대 일본 땅에서 기름지게 먹고산 일본 백성들도 결국은 조선 백성이 피를 흘린 값으로 그렇게 산 것이 아닌가? 이 전쟁 앞에서 떳떳할 수 있는 자, 아무도 없다.
목숨을 살리는 일에는 나중이 없다
지금가지 모두 사만 명. 하룻밤 사이 또 스물넷이 죽었다고 한다. 최소 팔루자 넷, 아마라 열둘, 나자프 여덟. 이렇게 수를 헤아리면서 나도 점점 목숨이 죽어가는 것을 숫자로 읽고, 숫자로 기억하려 한다. 죽어간 스물네 명의 사람들 또한 모두 사랑하는 식구가 있겠지. 그이가 만약 아버지라면 굵은 수염을 부비며 사랑했을 아기가 있겠지. 그이가 만약 사춘기를 지나가는 소년이라면 풋사랑에 빠져든 여자친구가 있었는지도 모르지. 내일이 돌아오면 고백을 해야지 하며 마음속으로 수줍은 용기를 키우고 있었을지도. 그이가 만약 가축을 치는 농사꾼이었다면 아기를 밴 양을 보면서, 달걀을 품는 닭을 보면서 앞날에 대한 꿈을 꾸었는지도 모른다. 아침저녁으로 어미 양을 들여다보면서, 닭 모이를 주러 나가면서 …. 그런 사람들, 우리와 똑같이 꿈이 있고, 사랑을 나누며 살아가는 그이들이 하룻밤 사이에 또 스물넷이 죽었다. 당장 끝내야만 하는 이 전쟁, 하루라도 앞당겨 끝내면 그와 같은 목숨을 최소한 스물은 더 살릴 수 있다는 말은 과장이 아니다.
이라크는 날이 갈수록 더 험해지고 있고, 더 많은 피를 흘리고 있는데 오히려 우리나라 안에서는 점점 잊혀져가고만 있다. 더 많은 침략군대를 보내놓고 거꾸로 더 잊어가고 있다. 그동안 함께 애쓰며 싸워온 사람들조차 많이 자리를 떠나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 내 잠잘 자리와 먹을거리, 입을거리들이 이라크인들이 흘리는 피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면, 우리가 직접 그 전쟁에 뛰어들어 침략에 동참하고 있다는 걸 기억한다면, 철군을 위한 노력은 한시라도 멈추거나 미루어 둘 수 없다. 목숨을 살리는 일에는 나중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미안하다, 얘들아. 세이프, 핫산, 레이스, 오마르, 네자르, 하이들, 알라위 …
아동문학가 박기범 님의 글인데 이것저것 생각해 볼 내용이었습니다.
나누고 싶어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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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이렇게 살아도 되는 것인가
이라크 파병을 보며
박기범 박기범 - 동화작가. 저서로 동화집 <문제아>가 있다. 지난 2003년 3월 이라크평화팀의 일원으로 이라크에서 반전·평화활동을 편 이후, 인터넷카페 ‘바끼통(cafe.daum.net/gibumiraq)을 중심으로 시민·어린이들과 함께하는 풀뿌리 평화운동을 끈질기게 펼치고 있다. 지난 8월 9일부터, 살고 있는 경북 울진에서 한국군 철수 및 이라크전 종전을 위한 캠페인을 진행하면서 단식 중이다.
단식을 시작한 지 스무 하루째. 어제 서울에 올라왔다. 이 나라는 지난 8월 3일 자이툰 부대 선발대를 ‘도둑파병’하더니, 마침내 어제(8월 28일) 본진을 떠나보냈다. 한 나라의 군대가 또 어떤 나라를 짓밟기 위해 떠나고 있지만 나라 안에서는 어떤 신문이나 방송도, 국민의 대표기관도 이를 얘기해주지 않는다. 그랬으니 사람들이 모르는 것도 어쩌면 당연하다. 그것과 상관없이 아무 일 없던 것처럼 지내는 것 또한 어쩌면 당연한지 모른다. 기어이 우리가 침략군을 보낸 나라의 백성이 되고야 만 날, 이 부끄러운 순간이라도 똑똑히 기억해 두어야겠다는 마음이 나를 서울로 떠밀었다. 적어도 그것에 반대하고 슬퍼하는 이들, 함께 맞서 싸울 이들과 함께하려고 광장으로 쫓아올라왔다. 여섯 시간이 넘게 걸리는 길, 물론 조금 늦기야 했지만 올라와 보니 집회는 벌써 끝났다. 들어보니 모인 사람 수도 삼사백 명에 지나지 않았다고 한다. 솔직히 말해,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만큼은 침략군을 떠나보낸 이 나라의 처지가 슬픈 것보다 침략군을 보내놓고도 버젓이 아무 일 없는 듯이 살아가는 우리네 현실이 더욱 슬펐다. 무섭고, 어지러웠다.
요사이 한참 시끄럽던 올림픽, 어쩌다 본 텔레비전에서는 아테네라는 도시에서 폭죽이 올라오는 모습이 보였다. 사람들은 아주 흥겨워했고, 그것을 보여주는 텔레비전은 그 분위기를 한껏 부추겼다. 바로 그 시간, 나자프라는 도시에서는 최소 백육십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전투기의 캐논포와 바주카포에 맞아 죽어가고 있었다. 모르긴 몰라도 올림픽이 열리던 아테네와 학살이 벌어지던 나자프는 서울과 도쿄의 거리만큼이나 멀지 않은 곳. 한 하늘에는 축제의 폭죽이 그리고 건너편 하늘에는 학살의 불꽃이 함께 피어오르고 있었던 거다. 학살만 해도 무서운데 그 학살 곁에서 축제를 벌인다는 현실이 나는 더욱 무섭다. 이 무서운 현실 앞에서 나라 안의 온갖 방송과 언론은 오로지 축제의 불꽃만 보여주고 있었고, 사람들조차 온통 그것에만 사로잡혀 있다는 것은 더더욱 무서웠다.
잘라 말하면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젊은이들을 두 모둠을 지어 내보냈다. 한 모둠은 올림픽 선수단, 또 한 모둠은 자이툰 부대. (결코 운동경기를 깎아내리려 하는 것은 아니다. 나 또한 월드컵이나 올림픽이 열리면 좋아하는 경기를 빼놓지 않고 보는 편이었다. 더구나 결승이나 메달을 앞둔 마지막 경기에서 드라마틱하게 역전과 재역전을 되풀이하는 장면이라도 나오면 숨이 막히도록 흥분이 되고 손에 땀을 쥐었다. 돈에, 권력에, 패거리의 힘에 좌지우지되는 세상의 승부들에만 질려 있다가 그나마 정직한 승부, 최선을 다하는 모습, 결과에 대한 깨끗한 승복이 지켜지는 운동경기는 그것만으로도 아주 훌륭하다. )
한 모둠은 그 애초의 정신이야 어떻게 변질이 되었건 적어도 잔치의 자리, 축제의 자리에 가있다. 그리고 또 한 모둠은 학살의 땅에 침략자가 되어 떠나 있다. 학살의 땅에서는 날마다 사람들을 죽이고 있다. 가장 끔직한 모습으로, 가장 처참하게 사람들을 죽이고 있다. 죽지 않은 이들이 느낄 공포와 고통은 죽은 이들의 것 못지않다. 바로 그 땅에 우리 젊은이들이 동참하고 있다. 죽이고, 짓밟고, 피를 묻히고 있다. 하지만 나라 안 어느 신문이나 텔레비전을 보아도 학살의 땅에 가있는 우리 젊은이들 소식은 전하지 않는다. 학살의 땅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에 대해서는 영 모른 척하기만 한다. 그러면서 축제, 축제, 축제. 우리는 한 손에 피를 묻히고 있으면서, 한 손으로는 무자비하게 이웃나라 사람들을 죽이고 짓밟고 있는데도 그건 영 모른다는 척, 알면서도 모른 척 운동경기장에만 눈을 두고 있다. 세상이 이렇게 돌아가도 되는 걸까? 우리는 정말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걸까?
지난해 3월, 이 전쟁이 시작하기 전 아무런 계획도 없이 이라크로 떠났다. 맨 몸으로 사람들이 모인다고 했고, 여러 나라에서 꽤 많은 사람들이 모인다는 말을 들었다. 맨 몸으로 하는 일이라면 나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폭격이 쏟아지던 밤들, 나는 그 소리에 놀라 방공호에서 손으로 모리를 감싸고 벌벌 떨기도 했다. 오히려 나는 함께 지내던 이라크 친구들에게 위로를 받기도 했다. 그리고 한국에 돌아와 지금까지 이 전쟁과 함께 살고 있다. 이 전쟁 내내 내가 배우고 있는 것을 두려움이고 부끄러움이다. 나는 요즘 들어 자주 흥분해서 말하는 나를 본다. 지금 모습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답게, 열심히 사는 동무 앞에서도 내 감정에 못 이겨 가시 돋은 말을 하기도 했다. 그런 말들은 사실 누구를 향해 있기보다 다 나에게 하고 싶은 말을 어 쩌지 못해 소리치는 울부짖음 같은 거였다. 지금 단식을 하고 있는 것도 그렇다. 분명 나는 파병철회·철군 싸움의 무기가 되고자 음식을 끊은 것이지만 내 안으로는 여전히 어떤 부끄러움 때문이기도 하고, 지우지 못하는 두려움 때문이기도 하다. 그동안 단식일지를 써오면서 구 부끄러움과 두려움을 고백했다. 그 가운데 나를 가장 힘들게 하던 이야기이면서 앞으로 두고두고 풀어나가야 할 숙제이기도 한 것 몇 대목을 아래에 붙인다. (단식 4일째였던 8월 12일과 9일때였던 8월 17일의 단식일지 가운데서)
“승용차를 버려야 파병도 안할 수 있다”
지난겨울 16대 국회에서 파병안 통과가 있기 전 보름 단식을 마치고 바로 찾아간 곳이 안동이었다. 권정생 선생님은 아주 몸이 좋지 않으신대도 그날따라 반겨 맞으며 좁디좁은 방안까지 들여 주셨다. 그리고 두어 시간 말씀을 들었는데 그때 하신 말씀 중에 단식은 왜 했느냐고, 그런 거 하지 말라고, 하려면 한 천명이고 만 명이고 다같이 청와대 앞으로 가서 굶으면 모를까, 혼자 그리 굶는다 해서 어찌 되겠느냐 하셨다. 지금같이 해서는 될 일이 아니라는 말씀이셨다. 그러면서 잇는 말씀이 대강 이랬다. 환경운동을 한다는 사람들이 죄 차를 몰고 다니면서 독한 연기를 뿜고 다니는데 그게 무슨 환경운동이냐고, 텔레비전에서 전쟁반대 데모 같은 걸 봐도 얼굴에 화장을 하고 좋은 옷을 입고 하는데 그래서 어떻게 전쟁을 반대하겠느냐고. 기름 때문에 지금 전쟁이 일어나고 있는데, 기름을 그리 써대면서 무슨 전쟁을 반대하느냐고.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선생님의 이 말씀을 새겨듣지 못했다. 한다는 소리가 겨우 “어휴, 선생님 자수할게요. 저도 오늘 자동차 운전해서 왔거든요.”하는 말을 어리광처럼 했다. 그러고는 “그래도요, 더 못되게 자연을 망가뜨리고 다니는 사람들, 못살게 굴고 빼앗는 사람들이 온 나라로, 전 세계로 다니며 그렇게 나쁜 짓을 하니까 그거 못살게 구는 거라도 좀 덜 못살게 굴 수 있게, 그거 막느라고 다니려면 어쩔 수 없이라도 차를 타야 하지 않아요?” 하고 물었다. 여전히 나는 어리광 섞인 말투, 선생님의 말씀을 꼭꼭 새기며 생각해보지 않은 채였다.
몇 달 뒤, 아는 선생님 한분이 안동에 다녀왔다. 하시며 차 몰고 갔다가 선생님께 혼이 나고 왔다 하시며 웃었다. 그분 또한 “그래, 원칙으로야 선생님 말씀이 맞지. 그런데 요즘 세상에 어떻게 차 없이 살 수가 있나?” 하며 말끝을 흐리면서 씁쓸한 웃음을 지을 분이었다. 여전히 나는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아마 이분처럼 나도 요즘 세상에 어떻게 차 없이 살 수가 있나 하는 정도로 그저 흘려버리기만 한 것 같다.
그러다 문득 선생님의 말씀이 되살아나 나를 흔들어놓은 건 광화문 집회에 올라갔다가 내려오려고 동서울 버스터미널에서 버스를 탈 때였다. 생각해보면 나는 지난여름 이라크에서 돌아오고 난 뒤, 가을에 2차 파병에 대한 이야기가 한창 될 때부터는 거의 반년 동안 주말마다 반전집회에 참석하러 서울에 다녀왔다. 서울까지 버스값이 이만사천 원이니 한번 다녀오면 적어도 오만 원. 찻삯만 해도 보통이 아니었다. 때로는 버스를 탔고, 때로는 손수 차를 몰았다. 짐을 많이 싣고 가야 할 때나 다니면서 이곳저곳 들러야 할 곳이 많다 싶으면 주저 없이 차를 몰았다. 버스값보다 차를 몰고 가는 값이 조금 더 비싸기는 했지만 몇 천원 차이이니 그리 큰 낭비를 한다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러면서 어쩌다 한번씩 나 말고 다른 분들도 서울에 갈 일이 있어서 내 차에 몇 사람을 태우면 나는 대단한 절약이라도 한 듯 뿌듯해 했다. 네 사람이 버스를 타려면 차비가 십만 원은 드는데 한 차로 가면 많아야 삼사만 원이면 가지를 않나?
하지만 나는 올봄, 버스를 타고 내려오다가 머리를 얻어맞은 것처럼 크게 놀랐다. 울진까지 내려오는 버스, 30명이 넘게 탈 수 있는 버스에 고작 세 사람이 앉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절약이라고? 나는 내가 살고 있는 모습, 내가 쉽게 생각해버리고 있던 것들이 온통 잘못되었다는 걸 알았다. 만약에 나는 네다섯 사람이 함께 가는 길이었으면 승용차를 몰아 한 차에 타고 내려왔을 거다. 그러면서 버스값에 견주어 칠팔만 원은 아꼈으니 대단한 절약을 했다고 자부했겠지. 그런데 과연 그런가. 내가 따로 승용차를 몰고 내려온다 해도 버스는 여전히 겨우 두서너 사람만을 태운 채 똑같은 기름을 태우고 울진까지 내려올 것이다. 승용차를 탄 그 다섯 사람은 버스값 칠팔만 원 정도를 아끼게 된 셈이지만, 기름은 버스 한 대가 태워도 될 거세 자가용 한대 기름을 더 태우게 된 것이다. 이게 절약인가.
내 셈법은 이리도 간사했다. 다섯 사람이면 승용차 한 대로 움직일 수 있으니 버스값을 아낄 수 있다는 발상은 그야말로 내 주머니의 절약만을 생각한 것이다. 세상은 지금 석유가 없어 전쟁이다. 석유를 빼앗기 위해 미국과 영국을 비롯해 내 나라 한국까지 침략전쟁을 벌이고 있다. 죄 없는 이라크 사람들을 폭격 속에 죽어가게 한다. 거기에 나는 반전을 외치면서, 이라크에서 만나고 온 이들의 죽음에 가슴아파한다면서 한편으로는 태우지 않아도 될 기름을 더 태우고 있었다. 어처구니가 없다. 부끄럽다. 내가 과연 전쟁 반대를 말할 자격이나 있는가.
“승용차를 버려야 파병도 안할 수 있다.” - 권정생 선생님이 <작은책> 8월호에 쓴 글의 제목이다. (혹시 아직 읽지 않은 분이 있으면 꼭 읽기를 바란다.) 선생님이 말한 승용차는 비단 승용차만을 말하는 것이 아닐 것이다. 옳은 길이 아님을 알면서도 편안함만을 쫓는 우리의 생활방식. 내 몸, 내 생활은 계속해서 기존 질서에 순응해서 파괴하는 삶대로 살아가면서 근본적인 삶에 대한 성찰은 없는 채, 어떻게 세상을 구원할 수 있겠는가를 묻는 호된 가르침일 것이다.
나는 참을 수 없이 부끄러웠다. 그토록 권정생 선생님을 따르고 배우며 살고 싶다 하면서도 결국에는 그렇게 진짜 가르침을 몸으로 받지 못하고 지냈다.
선생님은 <녹색평론> 지난호에서 “고속도로를 씽씽 달리는 자동차들이 바그다드를 향해 폭격을 하는 전투기와 하나도 다르지 않다”고 말씀하셨다. 지금까지는 그래도 주저 없이 선생님을 죄러 가고, 선생님 앞에서 어리광도 부리고 했지만 앞으로는 오랫동안 선생님을 찾아뵙지 못할 것 같다는 마음이 들었다. 당장 읍내에 나가 자전거를 샀다. 가파른 언덕이 넷, 자전거를 타고 읍내에 한번 나갔다 오면 옷이 땀에 절어 다 달라붙는다. 하지만 김선일 씨가 죽고, 그 뒤로 저녁마다 군청 앞에서 피켓시위를 시작하면서 나는 다시 차를 몰았다. 울진읍까지 나가려면 20킬로, 날마다 걷거나 자전거를 타고 고갈 길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 단식을 하면서 농성장에 다니는 것 또한 차에 몸을 기대지 않고는 다닐 수가 없다.
지금도 차에 시동을 걸 때마다 가슴에 내려가지 않고 걸리는 게 있다. “석유가 모자라 사람들은 죽고 죽이는데, 나는 또 얼마만큼의 석유를 태운다.” 그저 지금은 최소한 버스가 닿는 곳, 닿는 시간이면 승용차를 타지 않겠다는 약속이나 할 뿐이다.
평화를 위한 삶의 방식
결국이 전쟁은 부시가 일으킨 것이기도 하지만 현재 삶의 방식에 길들여져 사는 내가 낳은 것이기도 하다. “나는 반전평화를 외쳤어, 나는 파병반대를 말했어, 나는 전쟁을 일으키는 저들 편이 아니야!” 하는 것이 과연 우리에게 면죄부를 줄 수 있을까? 아무리 소비하는 삶의 반대편에 서고자 했다 해도, 아무리 개발에 반대하고 전쟁에 반대한다 해도 결국 나는 소비하는 삶을 아주 다 거부하지 못했고, 어떤 식으로든 개발과 전쟁의 이익에 기대어 살았다. 전쟁 앞에서 전쟁을 막고자 하는 노력이 틀렸다는 것이 아니다. 그건 의심할 것 없이 하루라도 미루어서는 안 되는, 당연히 해야만 하는 일이다. 허나 지금 벌어지는 전쟁을 막고자 애를 쓰는 것과 동시에 우리가 전정으로 이 세상에서 전쟁을 없게 하려면 삶의 방식을 바꾸어야 하지 않을까? 소비에 기대지 않는 삶, 자본에 기대지 않는 삶, 개발에 기대지 않는 삶, 우리부터가 소비와 자본, 개발로부터 자유로워야 비로소 우리는 그것들에 맞서 싸우는 데서 제대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다.
어차피 이 지구에 있는 석유는 바닥이 날 것이다. 지금 부시를 비롯해 석유 개발권을 욕심내는 자본이야 그것을 알고서 발빠르게 탐욕을 부리고 있는 것이지만 몇 백 년 뒤 석유가 바닥이 나고 나면 정작 그때는 어떻게 할 것인가? 반전운동을 하는 이들조차 석유 없이는 아무것도 못하는 지경에 와있는데, 그야말로 석유가 바닥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석유에 기대는 삶의 방식이 바뀌지 않는 한 어떤 선한 권력, 어떤 반자본적 권력이 들어선다 해도 결국 전쟁은 불가피한 것이 아닐까? 당장 써야할 석유가 모자라 전쟁을 벌이는 때가 와도 석유를 태우면서 전쟁을 하지 말라고 할 것인가? 한 마을에 물이 모자라 싸움을 하면 적어도 그 싸움을 말리겠다 하는 사람은 물을 최소한으로 덜 써야 하는 것 아닌가? 이 전쟁 앞에서 과연 누가 자유로울 수 있겠는가?
당장 급한 것은 물론 이 침략과 점령에 맞서는 것, 날마다 최소 스무 명 이상을 죽이는 이 학살을 끝내는 것이다. 침략자들은 일년 반 동안 모두 사만 명의 목숨을 죽였다. 하루 최소 스무 명, 한 달에 천명 가까운 사람들을 죽이고 있다. 이 전쟁의 끝을 하루라도 앞당기면 스무 명의 목숨을 더 살릴 수 있다. 이틀을 앞당기면 마흔 명, 한달을 앞당기면 천 명의 목숨을 살릴 수 있다. 당장 멈추게 해야 한다. 동시에 그것과 아울러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이 전쟁을 낳을 수밖에 없도록 하는 우리들 삶의 방식을 바꾸는 것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석유 중심의 개발과 소비에 기대는 삶을 바닥부터 바꾸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석유에 기대지 않아도 좋을 다른 에너지를 찾아 써야 하고, 석유든 다른 에너지든 굳이 기계의 힘에 기대지 않고 살 수 있는 삶으로 되돌아가야 할 것이다. 이것이 없는 채 전쟁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석유를 품은 땅이면 이라크가 아니라 사우디아라비아에서도, 러시아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
침략군을 보낸 나라의 백성
7월 말, 울진 군청 앞에서 군민들과 함께 ‘파병철회 작은 문화제’를 준비하던 때, 한 플래쉬 영상을 보고 나는 숨이 멎는 것 같았다. 그 플래쉬는 대구에 사는 박선주 님이 <한겨레>의 ‘왜냐면’에 쓴 글을 바탕글로 삼아 만든 것이었는데, 그 가운데 한 대목이 이랬다.
… 부끄러운 나라에 살고 있는 부끄러운 사람입니다. 어릴 적부터 남을 때리지 말라고 배웠고 어린아이를 때리면 부모님께 혼났습니다. 그리고 이제 세살자리 아이를 둔 부모가 되었습니다. 아이에게 약한 자를 때리지 말라고 가르쳐왔습니다. 그러나 이젠 아무것도 가르칠 수 없습니다. 난 수천 명의 아이들이 폭격을 피하려고 숨어있는 지하실에 정확히 명중시킨 날에 손뼉을 치는 사람입니다. 내 나라가 나를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 아이가 감기에 걸렸는데 이라크 수만 어린이들의 죽음보다 내 아이 감기를 걱정해주는 자애로운 대통령이 있는 나라에 목숨 부지하며 살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정치인들은 매일 싸우는 것 같아도 아이들을 죽이느라 피곤한 미군들이 곤히 잠들 수 있도록 막사도 지어주고 미군들의 총이며 짐을 얼른 받아주기 위해 공병을 보내기로 하는 데는 힘을 합치고 있습니다. 내 손에 칼은 없지만 난 분명 남의 아기를 죽였고, 그 옆에서 울며 막아서는 엄마를 또 죽이고, 내일은 그들 가족, 그들 이웃 모두를 죽일 겁니다. 이런 고통을 잘 참았던 대가로 난 내일 고기가 오른 밥상을 대하겠지요. 그 아이들의 살점이 대신해서 내 입으로 들어가 단맛을 내고 내 속에서 오장육부를 튼튼히 하겠지요. 그렇게 난 살이 찌겠지요. … 아, 저는 살려 달라 애원하는 수만의 아이를 무차별로 총질하며 한 팔로는 내 아이를 감싸고 있는 천박한 어미가 되었습니다. …
어쩔 수 없이 나는 침략군을 보낸 나라의 백성이 되고 말았다. 이 나라의 군대 또한 침략군과 한 패거리가 되어 그 땅 사람들을 죽일 것이고, 그 땅 사람들의 것을 빼앗을 것이다. 내가 아무리 이 전쟁을 반대했고 우리나라의 군대를 보내는 것에 반대를 해왔다 할지라도 피할 수 없이 나는 침략군을 보낸 나라의 백성이다. 내가 먹게 될 음식, 내가 집에서 켜는 전깃불, 개나 물을 데울 때 쓰는 가스, 먼 길을 갈 때 타는 버스 … . 그 모든 것들에는 이미 침략과 전쟁으로 죽어간 이라크인들의 목숨이 스며 있다. 내가 낼 세금이나 기름값, 가스값, 버스값, 음식값 따위들은 모두 이 전쟁과 관련이 없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들의 값이 올랐다면 그건 이라크로 보낸 군대의 총과 탱크를 마련하느라 더 높은 세금이나 물건값을 내게 되기 때문이고, 거꾸로 그 전보다 내려간다면 그건 수많은 이라크인들을 죽이고, 그 땅 사람들의 삶을 망가뜨려서 빼앗아온 무언가가 보태어졌기 때문이다. 값이 그대로라 해도 물론 마찬가지다. 벌써 지난 8월 10일, 이 나라 국회는 군대를 보내 싸우는 곳에 삼천 억이 넘는 돈을 쓰기로 결정했다. 앞으로 우리 군대가 이라크인에게 총을 들이댄다면 그건 내가 낸 세금으로 만든 총이며, 더구나 그 총으로 이라크인을 죽게 한다면 바로 내가 만든 총알로 그이들을 죽게 만드는 것이다. 누가 아니라고 할 수 있는가? 일제시대 일본 땅에서 기름지게 먹고산 일본 백성들도 결국은 조선 백성이 피를 흘린 값으로 그렇게 산 것이 아닌가? 이 전쟁 앞에서 떳떳할 수 있는 자, 아무도 없다.
목숨을 살리는 일에는 나중이 없다
지금가지 모두 사만 명. 하룻밤 사이 또 스물넷이 죽었다고 한다. 최소 팔루자 넷, 아마라 열둘, 나자프 여덟. 이렇게 수를 헤아리면서 나도 점점 목숨이 죽어가는 것을 숫자로 읽고, 숫자로 기억하려 한다. 죽어간 스물네 명의 사람들 또한 모두 사랑하는 식구가 있겠지. 그이가 만약 아버지라면 굵은 수염을 부비며 사랑했을 아기가 있겠지. 그이가 만약 사춘기를 지나가는 소년이라면 풋사랑에 빠져든 여자친구가 있었는지도 모르지. 내일이 돌아오면 고백을 해야지 하며 마음속으로 수줍은 용기를 키우고 있었을지도. 그이가 만약 가축을 치는 농사꾼이었다면 아기를 밴 양을 보면서, 달걀을 품는 닭을 보면서 앞날에 대한 꿈을 꾸었는지도 모른다. 아침저녁으로 어미 양을 들여다보면서, 닭 모이를 주러 나가면서 …. 그런 사람들, 우리와 똑같이 꿈이 있고, 사랑을 나누며 살아가는 그이들이 하룻밤 사이에 또 스물넷이 죽었다. 당장 끝내야만 하는 이 전쟁, 하루라도 앞당겨 끝내면 그와 같은 목숨을 최소한 스물은 더 살릴 수 있다는 말은 과장이 아니다.
이라크는 날이 갈수록 더 험해지고 있고, 더 많은 피를 흘리고 있는데 오히려 우리나라 안에서는 점점 잊혀져가고만 있다. 더 많은 침략군대를 보내놓고 거꾸로 더 잊어가고 있다. 그동안 함께 애쓰며 싸워온 사람들조차 많이 자리를 떠나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 내 잠잘 자리와 먹을거리, 입을거리들이 이라크인들이 흘리는 피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면, 우리가 직접 그 전쟁에 뛰어들어 침략에 동참하고 있다는 걸 기억한다면, 철군을 위한 노력은 한시라도 멈추거나 미루어 둘 수 없다. 목숨을 살리는 일에는 나중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미안하다, 얘들아. 세이프, 핫산, 레이스, 오마르, 네자르, 하이들, 알라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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