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송해요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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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윤연섭 작성일08-03-16 22:34 조회1,887회 댓글1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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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송해요 어머니!
한 시대를 사신 어머니를 추억합니다. 자식이 무엇이기에 자녀들의 행복을 위하여
한평생을 바치셨습니다. 아들만 셋을 두셨기에 무뚝뚝하고 정 없는 말만 내뱉는 아들들을
그냥 그러려니 하고 감당하셨습니다.
둘째인 저를 많이 사랑하셨습니다. 몸이 태어나면서부터 약했기 때문입니다.
그 시대에는 다들 가난해서 먹을 것이 없었던 시대이지만 저희 어머니도 음식을 못 드셔서 젖이 안 나와 아들에게 늘 젖을 못 먹인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사셨습니다.
밥물을 젖 대신 먹이면서 약한 저를 늘 연민의 마음으로 다독이셨습니다.
공부를 시켜 놨더니 시골에 내려와서 축산을 한다고 하는 저를 담담히 지켜보시며 저의 후원자가 되어 주셨습니다. 삼형제 중에 유일하게 교회에 다니는 저를 위해서 학생들과 수련회를 갔을 때에는 축사의 잔일을 도맡아 해 주셨습니다.
두형제가 농촌에서 잘 살지도 못하면서 허덕이는 것을 보시며 채소밭과 농장에서 일을 거들어 주시면서 주님 앞에 가시기 두 달 전까지 채소를 다듬으셨습니다.
제가 방글라데시로 떠나면서 그리도 슬프게 우셨던 어머니! 휴가차 나오면 저의 검게 탄 얼굴을 보시고 또 슬피 우셨던 어머니!
“안가면 안 되니? 언제오니?” 늘 이런 질문에 저는 대답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스스로 약속을 했는데 그것은 어머니 살아 계신 동안에는 우산을 쓰고 다니며 살을 태우지 않기로 다짐을 했습니다.
어머니는 작년 10월에 제가 잠시 왔다가 갈 때에 가장 슬피 우셨다고 합니다.
세상에서의 영원한 이별을 염두에 두셨나 봅니다. 올 1월 달에 어머니가 위독하셔서 들어 왔을 때에 어머니는 다 돌아가셨다가 다시 회복하셨습니다. 제 모습을 보고 힘을 얻으셨나 봅니다. 2월도 막바지에 들어서면서 방문 팀이 우리 사역지에 오면서 저와 아내는 기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방문 중에 돌아가시면 어떻게 하나, 우리는 모든 일을 주님께 맡겼습니다. 드디어 일정을 하루 남기고 전화가 왔습니다.
어머니가 너를 찾는다는 이야기와 빨리 들어와야 한다는 강청이 있었습니다.
어머니를 주님께 의탁하고, 하루의 일정을 다 채우고 같이 들어가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다카에 와서 선교사들의 선교현장을 방문하면서도 마음은 어머니 곁으로 가 있었습니다.
인천공항에 내리면서 우리는 병원으로 직접 가기로 하고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였습니다.
병원에 도착하니 어머니는 의식을 잃으셔서 눈만 감고 저희를 알아보지 못하셨습니다.
“어머니! 그리도 보고 싶었던 아들이 왔는데 눈을 뜨셔 야지요!” 어머니 얼굴에 제 얼굴을 비비면서 한참이나 울었습니다.
집에 다녀와서 밤샘을 하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옷을 갈아입고 왔더니 어머니는 실눈을 뜨시고 저와 눈 맞춤을 하면서 눈물을 계속 흘리셨습니다. 하실 말씀이 있었지만 힘이 없으셔서 말을 못하셨습니다.
제 친구가 문병을 와서 연섭이가 내일 온다는 말을 한 이후로는 문만 열면 문을 쳐다보면서 저를 기다리셨습니다. 그리고 ‘내일’을 얼마나 반복하셨는지 모른다고 합니다. 그날 밤 우리는 몸이 피곤 할 테니 그냥 집에서 쉬라는 제수씨의 요청을 받아들여서 집에서 잤는데
그것이 영원한 이별이 되었습니다. 3월1일 삼일절 승리의 날에 하나님의 품에 안기셨습니다. “죄송해요 어머니! 운명의 순간에 제가 함께하지 못해서요.” 어머니 사랑합니다.
눈물도 없는... 근심도 없는... 천국에서 뵙기를 원합니다.
한 시대를 사신 어머니를 추억합니다. 자식이 무엇이기에 자녀들의 행복을 위하여
한평생을 바치셨습니다. 아들만 셋을 두셨기에 무뚝뚝하고 정 없는 말만 내뱉는 아들들을
그냥 그러려니 하고 감당하셨습니다.
둘째인 저를 많이 사랑하셨습니다. 몸이 태어나면서부터 약했기 때문입니다.
그 시대에는 다들 가난해서 먹을 것이 없었던 시대이지만 저희 어머니도 음식을 못 드셔서 젖이 안 나와 아들에게 늘 젖을 못 먹인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사셨습니다.
밥물을 젖 대신 먹이면서 약한 저를 늘 연민의 마음으로 다독이셨습니다.
공부를 시켜 놨더니 시골에 내려와서 축산을 한다고 하는 저를 담담히 지켜보시며 저의 후원자가 되어 주셨습니다. 삼형제 중에 유일하게 교회에 다니는 저를 위해서 학생들과 수련회를 갔을 때에는 축사의 잔일을 도맡아 해 주셨습니다.
두형제가 농촌에서 잘 살지도 못하면서 허덕이는 것을 보시며 채소밭과 농장에서 일을 거들어 주시면서 주님 앞에 가시기 두 달 전까지 채소를 다듬으셨습니다.
제가 방글라데시로 떠나면서 그리도 슬프게 우셨던 어머니! 휴가차 나오면 저의 검게 탄 얼굴을 보시고 또 슬피 우셨던 어머니!
“안가면 안 되니? 언제오니?” 늘 이런 질문에 저는 대답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스스로 약속을 했는데 그것은 어머니 살아 계신 동안에는 우산을 쓰고 다니며 살을 태우지 않기로 다짐을 했습니다.
어머니는 작년 10월에 제가 잠시 왔다가 갈 때에 가장 슬피 우셨다고 합니다.
세상에서의 영원한 이별을 염두에 두셨나 봅니다. 올 1월 달에 어머니가 위독하셔서 들어 왔을 때에 어머니는 다 돌아가셨다가 다시 회복하셨습니다. 제 모습을 보고 힘을 얻으셨나 봅니다. 2월도 막바지에 들어서면서 방문 팀이 우리 사역지에 오면서 저와 아내는 기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방문 중에 돌아가시면 어떻게 하나, 우리는 모든 일을 주님께 맡겼습니다. 드디어 일정을 하루 남기고 전화가 왔습니다.
어머니가 너를 찾는다는 이야기와 빨리 들어와야 한다는 강청이 있었습니다.
어머니를 주님께 의탁하고, 하루의 일정을 다 채우고 같이 들어가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다카에 와서 선교사들의 선교현장을 방문하면서도 마음은 어머니 곁으로 가 있었습니다.
인천공항에 내리면서 우리는 병원으로 직접 가기로 하고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였습니다.
병원에 도착하니 어머니는 의식을 잃으셔서 눈만 감고 저희를 알아보지 못하셨습니다.
“어머니! 그리도 보고 싶었던 아들이 왔는데 눈을 뜨셔 야지요!” 어머니 얼굴에 제 얼굴을 비비면서 한참이나 울었습니다.
집에 다녀와서 밤샘을 하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옷을 갈아입고 왔더니 어머니는 실눈을 뜨시고 저와 눈 맞춤을 하면서 눈물을 계속 흘리셨습니다. 하실 말씀이 있었지만 힘이 없으셔서 말을 못하셨습니다.
제 친구가 문병을 와서 연섭이가 내일 온다는 말을 한 이후로는 문만 열면 문을 쳐다보면서 저를 기다리셨습니다. 그리고 ‘내일’을 얼마나 반복하셨는지 모른다고 합니다. 그날 밤 우리는 몸이 피곤 할 테니 그냥 집에서 쉬라는 제수씨의 요청을 받아들여서 집에서 잤는데
그것이 영원한 이별이 되었습니다. 3월1일 삼일절 승리의 날에 하나님의 품에 안기셨습니다. “죄송해요 어머니! 운명의 순간에 제가 함께하지 못해서요.” 어머니 사랑합니다.
눈물도 없는... 근심도 없는... 천국에서 뵙기를 원합니다.
댓글목록
최상득님의 댓글
최상득 작성일
윤선교사님의 마음을 누구보다도 이해를 합니다..
저 또한 같은 처지인지라..
그래도 그분의 길을 걷는 자로서의 본분이 있기에...
늘 그분을 향해 최선을 다해서 섬기시는 윤선교사님을위해 늘 두손 모으고있답니다..
건강하시고 승리하세요..
사랑합니다..
중국에서 지민이네가..